TL;DL 요약본
AI 전성시대에 역주행하며 펜탁스가 21년 만에 출시한 신제품 필름카메라 '펜탁스 17'(79만원)을 실제 사용해본 솔직한 후기. DSLR의 무거움과 귀찮음에 찍사 생활을 접었던 내가 다시 카메라를 들게 만든 펜탁스 17의 핵심 매력은 하프 필름 방식으로 필름 한 롤로 72장 촬영이 가능해 현상비 포함 장당 200원대라는 가성비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건 필름 카메라가 주는 내적동기 - 셔터 누르는 순간 모든 게 결정되어 그 한 컷에 온전히 집중하게 되는 몰입감이다.
인스타 좋아요 같은 외적동기로 찍던 디지털과 달리, 필름은 '더 잘 찍고싶다'는 순수한 욕구를 자극한다. 디지털과 필름 카메라의 차이는 전기차와 내연기관차의 차이 정도로, 성능은 디지털이 앞서지만 감성의 영역만큼은 필름이 압승이다.
AI가 지배하고, AI에 의해 직업도 사라질 위기의 지금, '알파고님 충성충성 ^^7' 해도 모자랄 판에 펜탁스는 필름 카메라를 출시했다. 복각도 아닌 무려 신제품으로. 펜탁스 17.
레트로 트렌드가 올드머니 룩부터 시작해서 수년 동안 꾸준히 부상하고 있고, 덩달아 필름 카메라도 야금야금 시장이 커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필름 카메라는 매니악한 취미라서 찍먹하고 대부분 손절하는 취미에 불과한데, 신제품을 출시하는 기염을 토하는 펜탁스에게 홍대병을 자처하는 내가 이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니, 필름 카메라를 누가 79만원을 주고 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DSLR을 주력으로 사용했지만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찍사 생활을 완전히 접었었다.
무거워.....
귀찮아.....
위 두 가지 이유가 합쳐져서 '찍는다'는 행위 자체가 재미없어졌다. 무거운 카메라를 '카메라 전용 가방'에 모시고 가서 사진을 찍는 이 근본적인 행위에 대한 회의감이 온 시점으로부터 카메라보다는 스마트폰으로 찍는 경우가 많아졌고 결국 자연스럽게 장롱 신세가 되어버린 것.
사진을 찍는 이유, 그게 뭐였지?
내가 사진을 찍었던 이유를 솔직하게 생각해보면 자랑용이었다. 커뮤니티나 인스타에 올려서 댓글받고 좋아요 많이 받으면 그걸로 내 목적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바라게 되는 시점부터 나보다 잘 찍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고 내 한계에 부딛쳤을 때 그 흥미가 점점 사그라든다. 외적동기는 한계가 명확하고 보상이 줄어드는 순간부터 동기도 함께 사라진다.
반면, 필름 카메라는 내적동기를 자극한다. 디지털 카메라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비교적' 가볍다. 물론 시간, 빛, 구도 다양한 요소를 치밀하게 고려하고 고민끝에 끝내 셔터를 누르지만 사진을 찍고 화면을 통해 결과물을 본 다음 마음에 안들면 지우거나, 또 찍거나, 수정하면 그만이다.
필름 카메라는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스캔할 때까지 결과물을 확인할 수 없고, 마음에 안든다고 지우거나 수정할 수 없다(카메라 자체에서). 결과적으로,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기에 그 순간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그렇기에 '사진을 더 잘 찍고싶다'라는 순수한 내적동기가 생겨난다.
"필름값도 더럽게 비싸고 한 번 찍기도 힘든데, 오히려 더 귀찮아서 안 찍게 되는것 아니냐!"
하지만 펜탁스 17은 이것에도 명쾌한 답을 내놓으니...
하프 필름
마음 놓고 셔터 갈겨도 현상비 포함 장당 200원대에 끊을 수 있는 혁신적인(수십년은 된) 가성비 메커니즘이다. 이런 이유로 찍는데 부담이 적으면서 필름 자체가 주는 독특한 느낌도 매력적이기에 멀쩡한 DSLR 팔고 79만원짜리 필름 카메라를 산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디지털 카메라와 필름 카메라는 전기차와 내연기관차의 차이 정도로 보인다. 편의성과 성능 부분에서는 당연히 전기차가 앞서지만 내연기관이 주는 감성의 영역은 절대 따라올 수 없듯 필름 카메라도 단순한 성능을 넘어 찍는 순간 셔터의 느낌, 찍고나서 필름을 감는 느낌, 1롤을 다 찍고 겨우 현상해서 결과물을 볼 때의 그 기대 등 입체적인 느낌은 디지털 카메라가 흉내낼 수 없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있다.
어쩌면 다시 찍사에 열정을 가져다준 것 그 자체로써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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